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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단편소설 - 철새 (3/3)

2019.08.16 10:39

김일홍 Views:245

[2에서 계속]

최송식은 당황 한듯하더니 금세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네, 이민을 갑니다. 미리 말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이민을 가는 최송식 씨의 진의가 무엇이요?

최송식은 갑자기 굳은 얼굴을 하며 우울했다.

“간첩이라는 소문도 있어요. 솔직히 말해 봐요.

나는 최송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그쳤다.

최송식은 머뭇거리더니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냉정했다.

최송식의 말인즉 죽기로 하고 남으로 내려왔는데 남에서 살기가 힘이 더 든다고 했다. 남한 땅이 낯설고 체제가 달라 적응이 쉽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리 잡고 살려고 무척 노력을 했단다. 여기저기 다니며 반공 강연을 수없이 했다. 강연비가 꽤나 들어왔다. 그래서 돈도 좀 모았다. 유명세도 붙었다. 조정관님의 도움이 무척 컸다고 감사 표시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아이들로 인해서였다. 학교에서 열심이던 큰놈 형준이와 둘째 인준이가 어느 날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최송식은 화가 났다. 아이들이 학교에 잘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루는 경찰서에서 최송식을 불렀다. 경찰서에 달려간 최송식은 아들들이 경찰서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히고 참담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순경은 익히 최송식을 잘 아는 경찰이다.

“그래서 내가 최 선생님을 부른 겁니다.

사건은 학교에서 아이들 간에 집단 패싸움을 한 것이다. 패싸움이라기보다 최송식 아들 형제와 반 아이들과의 싸움이었다. 처음부터 반 아이들이 형준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너 아버지 간첩이지.

“밤이면 A3 방송으로 이북에 암호를 보낸다며.

반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말을 했다.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형준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작심을 하고 놀려대는 아이들에게 간첩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반 아이들은 형준이를 간첩의 자식이라고 왕 따를 시켰다. 이 날도 아이들은 형준이를 가운데 놓고 간첩의 자식이라고 야유를 퍼부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형준은 교실에 있는 야구 방망이를 들었다.

“너들 더 이상 나보고 간첩 자식이라고 하면 죽여 버릴 거야.” 

형준의 으름장에 한 아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웃기네, 그럼 간첩이 간첩이라고 하겠어.

형준이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 아이에게 달려들어 방망이로 머리를 찍었다. 머리에 피가 터지며 아이는 쓸어졌다. 순간 아이들이 형준에게 달려들었다. 난투극이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생 인준이도 달려와 형을 도왔다. 선생들이 말리고 경찰이 오고, 방망이로 맞은 아이는 병원으로 실려 가고 야단법석이었다. 결국 두 아들은 경찰서에 끌려갔다. 다행이 병원으로 실려 간 아이의 상처는 대단치 않았다. 상처부위를 간단히 꿰매면 되었다. 경찰이 나서서 무마했다. 최송식이 치료비만 지불하고 사건은 끝내었다. 문제는 학교에서 상대아이는 그냥 두고 최송식 아들에게 퇴학 처분을 한 것이다. 편파 처리를 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송식 아이들은 아예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공부를 거절했다. 최송식 부부에겐 고민이 쌓이었다. 잘 살아 보자고 남으로 내려왔는데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기가 막힐 일이었다.

북한에서 보다 더 어렵게 살아야 하니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멀리 제 3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이다.

최송식에게는 두 번째 탈출이었다.

마침 해외개발공사에 반공 강의를 초청받아 나갔다가 브라질 농업이민 프로젝트를 알게 되어 수속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탈출했거나 간첩 이였던 사람들에게는 제한이 있었다. 보안상 쉽게 한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관계기관에 허락을 받고 이민을 가게 되었는지 그것도 최송식의 재주였다. 그간 아이들 문제로 고통을 받은 것을 참작했으리라.

“조정관님, 브라질의 농촌에 가서 모든 것을 잊고 농사나 짓고 살렵니다.

최송식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브라질로 떠났다.

 

오늘 브라질로 떠난 지 30 년 만에 설렁탕 집에서 최송식을 만난 것이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기구한 운명의 인연이리라.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길 건너 맥도날드에 가 커피나 마시며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자리를 옮겼다.

아들인 듯한 건장한 청년과 곱상한 파란 눈의 젊은 여자가 뒤를 따라 들어왔다. 우리는 모서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들이 두 잔의 커피를 가지고 왔다. 자기들은 볼 일이 있다고 한다.

“아들인가요?

나는 물었다.

“인사드려라, 옛날 서울에서 아버지가 모시던 상관이시다.

“상관은 무슨, 큰 아들인가요?

“네.

아들이 인사를 꿈뻑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건넨다. 명함을 보니 형준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스테파노로 되어 있었다. 의류 회사 오너로 적혀있었다. 주소는 한인들이 밀집되어있는 LA 자바 시장이었다. 잠시 후 이들은 어디 좀 다녀올 때가 있다며 나갔다.

“저놈이 보배입니다.

최송식은 느닷없이 아들 자랑을 한다. 아들이 미국까지 오게 된 원인 제공자이다.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브라질로 그리고 미국에 철새처럼 날아왔다.

“조정관님, 두 아이들이 없었으면 저는 살아 남지 못했을 겁니다.

최송식은 찹찹한 마음으로 브라질 이민 배에 올랐다. 부평초 같은 인생이었다. 태평양이 그렇게 넓을 줄을 몰랐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널 때 멀미로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가 더 심했다. 그 보다 북한을 탈출할 때 악몽이 살아나 더 괴로웠다. 장장 50여 일간 태평양을 건너 산토스 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름 모를 농촌으로 실려 갔다. 브라질 농촌에 도착하자 북한의 협동 농장으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다시 시작을 해야 하니 두려웠다. 어머니가 나타났다.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며 미소를 짓고 사라지신다. 그런데 서울에서 꿈같은 계약조건이 지켜지지가 않았다. 실망했다.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난감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같이 이민을 온 사람들이 한집 두 집 시골을 떠나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브리질 이민자들은 애초부터 농사를 짓고 살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정착 후 얼마를 살다 계약을 무시하고 도시로 나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상파울루에 한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한인들이 원래 손재주가 있어 가위와 바늘만 있으면 웃을 만들어 시장에 내 놓으면 옷이 잘 팔렸다. 한인들이 너도 나도 시장으로 몰려들었고 점차 제품 수요가 늘어 처음 한인들이 삯바느질을 하던 시대가 바뀌었다. 삯바느질은 원주민들에 시키고 한인들이 주축이 되어 봉제전문 공장을 세웠다. 최송식 식구는 농촌에서 대책 없이 지내다 아들들이 먼저 농촌을 떠났다. 농촌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상파울루로 불러내 친구 집에서 봉제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의 도움으로 노점상으로 시작했다. 장사가 솔솔 재미가 있었다. 부모의 도움이 필요했다. 얼마 후 아이들의 부름을 받고 아내가 도시로 나가 아이들과 장사를 시작했다. 아내는 손재주가 남달랐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의 옷을 손수 디자인해서 입힐 정도로 옷을 잘 만들었다.

그 실력을 브라질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처음엔 가위로 천을 잘라 만든 옷을 아이들이 시장에 나가 팔았다. 점차 아내는 패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새롭게 디자인해서 만드는 옷마다 히트를 쳤다. 아내는 타제품보다 한 발 앞서 나가는 디자인을 해 옷을 만들었다. 아내의 작품은 브라질 전역에 퍼졌다. 브라질의 바이어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10여년의 긴 시간을 되풀이하면서 돈을 벌었다. 엄청난 돈이 들어왔다. 도시 중심가에 빌딩을 구입해 큰 아들의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이제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최송식은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는구나 흐뭇해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던가 어느 날 아내가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원래 아내는 답답증이 있었다. 답답증은 북에서부터 가슴 조이고 살았을 때 생긴 병이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답답함을 가슴에 지니고 살았던가.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았다. 폐암 말기였다. 손을 쓸 여지도 없이 몸이 무너져갔다.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정관님, 하늘은 이놈한테 너무 과한 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최송식은 말을 하며 흘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면 그럴까? 인생무상이다. 최송식의 아내가 세상을 떴다는 말에 나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한 여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곤욕의 시간을 보냈는가? 목사의 딸로 태어나 최송식의 아내로 삶을 살았고 원산 탈출 시 조타실에서 친동생처럼 사랑하던 동진이를 도끼로 찍어 죽였을 때의 죄책감, 아이들이 학교에서 간첩의 자식이라고 왕 따를 당했을 때의 자괴감, 그리고 태평양을 넘어 브라질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슴이 타 들어가 언제가 미라가 될 것 같은 숨 막히는 순간들. 그나마 뒤늦게 천재적인 디자이너로 등장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반짝 행복의 희열 앞에서 결국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최송식 씨, 많이 늙었구려.

슬픈 이야기를 돌리려고 나는 엉뚱한 말을 했다.

“조정관님도요.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우리는 늙었나?

비가 억세게 쏟아지던 날, 충무로 복국 집이 생각났다. 그때는 청춘이었다.

“그래, 여기는 어떻게.

브라질에서 사는 사람이 미국은 웬일이냐고 나는 의아해 물었다.

“말하자면 길지요.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브라질이 싫어 졌어요. 매일 술로 세상을 등졌지요.

브라질에서 어느 정도 돈을 벌면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철새가 되어 미국으로 날아온다. 한국 사람들의 최종의 꿈은 미국 거주이다. 보다 살기 좋은 미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아이들 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큰 아들이 앞장을 섰다. 최송식의 손자 손녀가 벌써 초등학교에 다니다 보니 공부는 미국에서 해야 한다고 아들이 고집을 부려 브라질 회사를 정리해고 LA 자바 시장에 의류회사를 차려 미국으로 진출을 했다고 한다.

 

아내와 사별한 뒤로 최송식은 한 밤중에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웠다. 최송식은 아내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창밖에서 흐릿하게 밀려오는 한 밤중의 적요 속에서 정신 놓고 멍하니 앉아 있으면 아내 없는 집안이 새삼 적막강산 같았다. 빌딩이 있으면 뭐하나? 아내 없는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내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그저 지겨울 뿐 점점 우울증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꿈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환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향 집 앞 언덕 느티나무 밑에서 어머니가 손짓을 하며 아들을 부르는 모습이 40년 전처럼 떠올랐다. 어머니는 입을 우물거리며

‘아들아 내가 있는 곳으로 오려무나. 하고 손짓을 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밤마다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최송식은 죽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 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북에 가는 길을 알아보니 LA통협이라는 기관이 있어요.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는 곳인데 찾아가서 신청을 했습니다.

최송식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머니는 이미 타계를 했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는 살이 있을 겁니다.

지금 어머니의 생사 문제를 가지고 최송식이와 다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최송식이 북한에 들어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였다.

“북한에서 최송식 씨 신분을 알고 있을 텐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40 년이나 지났고 제가 미국 시민권자 아닙니까?

“시민권자라고 다 보호를 받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지금까지 극악의 상황에서 살아왔습니다.

말 같지 않는 말을 하는 최송식의 말에 나는 말을 아꼈다.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나 뉴욕의 유엔 본부에 나와 있는 북한 지도원에게 얼마의 돈을 건네준 느낌을 받았다.

“언제쯤 떠날 예정입니까?
“가을로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 때 잠간 다녀온다는 아들이 들어왔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북에 가지 마세요. 라고 말리기도 뭐해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나는 아들이 준 명함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정말 최송식이가 북한에 갈까 의심을 하면서도 최송식은 갈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북한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

선장과 동진을 죽이고 북한을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면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일상적인 생활로 다시 돌아가 최송식을 잊고 있었다.

 

이 한 해도 끝마무리에 닿았다.

해가 넘기 전에 나는 그 동안 다정했던 지인들에게 연하장이라도 보내려고 주소를 정리하다. 최송식의 아들이 준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스테파노 초이 명함을 들여다보는 순간 무엇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최송식의 얼굴이 확 밀려왔다. 북한을 잘 다녀왔는지 급해졌다. 나는 잘 보이지 않는 명함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전화가 열렸다.

“스테파노?

“네 누구세요?
“나 아버지 친구 알겠어??

“네, 알아요.

“아버지 계신가??

“아니요.

“그럼?

“북한에 있어요.

나는 수화기를 들고 멍청해졌다. 아들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북한에 가신지 3개월이 됐는데 소식이 없어요.

.......

“그래서 제가 북한에 가서 아버지를 모셔 와야겠어요.

아들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나는 갑자기 혼미해졌다. 할 말이 없어

잘 다녀오라고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북한에서 최송식을 쉽게 찾을 수가 있을까? 최송식의 소식은 아들이 북한을 다녀온 후에나 알 일이다.

                            

철새들의 비상은 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오랜 숙명을 단 한번 거슬린 적이 없이 그래서 이들의 날개는 삶의 신산(申酸)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철새인지 모른다.

최송식은 언제쯤 철새가 되어 다시 날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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