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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

민 공 기


  1950년 봄 6년제 중학을 졸업한 나는 두 달 후 6월 28일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 점령하에 3개월간의 악몽 같은 도피 생활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 3년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또다시 남으로, 인민군으로, 국군으로, 피난민으로 오고 또 갔다. 그중에는 열아홉 살의 나도 있었다. 전쟁 동안에 나는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한 지 한 달 만에 전사한 친구,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동창생, 인민 의용군에서 나를 구출해주고 이북으로 간 ‘빨갱이’ 친구…… 전쟁을 통해서 나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우연이 우리 삶에 미치는 막강한 힘을 알게 되었다.


  이 수기는 한국전쟁 첫 번째 해인 1950년 초여름부터 1951년 여름까지 격동의 1년 동안 내가 겪은 한국전쟁 일지이다.


  65년 전 한국,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7월 초 나는 체부동 한 골목에서 동네 민청원과 인민군에게 잡혀서 청운 국민학교에 있던 인민의용군 집합소로 강제 연행되던 중 우연히 지나가던 중학 동창생 김 군(옹진 출신 민청 요원이었다)의 힘으로 빠져 나오게 되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남긴 말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미국 놈들이 이 전쟁에 이렇게 대대적으로 참전한 이상 우리 공화국의 승산은 없다. 나는 끝까지 인민군하고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너는 미군이 다시 서울에 올 때까지 잘 피해 있어.” 나는 이후 김 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만일 이때 김 군이 나를 구출해 주지 않았다면 필경 나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정치이념보다 우정으로 나를 도와준 김 군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청운동 우리 집은 미군의 대포 직격탄을 맞고 지붕이 날아갔지만 다행히 지하실에 도피했던 우리 가족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포격이 끝난 새벽 우리 집 앞을 인왕산 쪽에서 아직 소년티가 나는 인민군 병사가 발에서 피를 흘리며 울면서 내려왔다. 북쪽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는 그에게 나는 말없이 북악산 쪽을 가르쳐주었다. 1950년 9월 28일 드디어 서울은 해방되었다.


  10월 초순에 나는 통역장교 시험을 치고 군에 입대하고 서울 명동성당에 설치된 연락 장교단 훈련소에서 두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입대했던 10월 초에 압록강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UN군은 중공군의 인해 참전으로 청천강에서 장진호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12월 초순에는 전군이 다시 남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육군 연락장교(통역장교 전신) 6기생으로 임관한 우리는 육군 본부와 함께 군용열차로 안동을 경유하여 대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대전에 신설된 국군 11사단에 배속명령을 받았다.


  50년 12월 24일 대구역에서 육군본부에서 보낼 jeep 차로 대전에 있는 사단사령부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역 앞 광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전쟁과 전장을 강력히 느끼게 하는 장면을 본다. 역내 platform에는 원주-횡성(그때의 최전방 전선)행 군용열차가 연기를 뿜으며 대기 중이었고 역전 광장에는 보충대대에서 트럭으로 계속 운송되어 온 수백 명의 신병들이 소대로, 중대로 편성되어 가고 또 딴 트럭으로 운송되어 온 신임 소위들이 한 명씩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갔다. 편성이 끝난 부대는 곧장 대기 중인 열차로 움직여 갔다. 대전으로

가는 국도에는 북쪽으로 가는 차량 수보다 남쪽으로 후퇴하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추풍령 부근에 왔을 때 저녁 하늘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초가집을 둘러싸고 허탈감에 빠진 듯 whisky를 병째로 마시고 있는 미군 수십 명을 만났다. 내 jeep 차를 보자 그중 한 명이 “Hey lieutenant, we are going back to Japan. No more Korea! Sayonara!” 하고 외쳤다. 완전한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계속 대전으로 달리면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을 느꼈다.


  내가 배속된 11사단 사령부는 그 후 대전에서 전주 남원을 거쳐서 51년 3월 동부 전선으로 이동할 때까지 지리산 일대의 게릴라 소탕전에 참가했다. 그때 지리산 게릴라부대는 낙동강까지 남하했다가 UN군의 인천 상륙 후 입산한 인민군 정기군과 6.25전 1948년에 있었던 여순-순천 반란 사건 때 입산한 구 빨치산의 혼성부대였다. 51년 2월 어느 날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의 포로가 사단 사령부에 연행되어 왔다. 나와 비슷한 20대 동년배의 그들, 남자는 서울대 수의과 대학을 다니던 의용군 출신이었고 여자 대원은 카키색 인민군복 밑에 아직도 순천여고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치열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밑에서 포로를 심문하고 포로로서 심문을 받던 그때 우리 세대의 슬픈 인연을 지금도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 부대는 51년 3월에 대구에서 중장비를 공급받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4월 초 양양에 있을 때 뜻밖에 나의 형인 민헌기 소위가 찾아왔다. 서울의대 졸업반이었던 형은 우리 사단 서쪽에 인접한 3군단 3사단에 야전 방역대원으로 배속되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입대한 후 소식이 끊어졌던 형을 전선에서 무사히 만나니 참으로 반가웠다. 특히 걱정했던 부모님 가족들이 부산 동래에 무사히 피난하셨다는 소식에 크게 안심이 되었다.


  형이 돌아간 지 한 달 후 5월 중순에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다.


  한국 전사 기록에도 남아있는 중공군 제2춘기 공세이다. 내가 있던 한국군 1군단 (11사단, 수도사단)이 있던 동해안 쪽은 비교적 무사했으나 우리와 인접한 산악지대의 3군단 예하 3사단과 9사단은 큰 타격을 받고 와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형이 있는 의무대는 후방에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5월 27일경 형의 의대 동기생이며 3사단에 같이 있는 김 소위가 나를 찾아왔다. 인제군 현리 부근의 험준한 산골짝에서 좁은 길을 후퇴하던 야전 방역대가 포위공격을 받고 나의 형을 위시해서 전원 비탈진 산으로 기어올라 피신했으나 그 후 대부분 인원이 행방불명이라는 것이다. 그중 포위망을 뚫고 살아나온 하사관의 이야기로는 나의 형은 사살됐거나 포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중공군 포위공격이 있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난 지금 살아나올 사람들은 다 나왔을 것이었다. 내가 흔히 통역을 맡고 있던 사단장(오덕준 준장)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강릉에 설치된 3군단 낙오병 수용소에 가서 형을 찾아보고 부산에 계신 부모님을 위로해 드리고 오라고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형은 수용소에도 없었다.


  3사단 야전 방역대의 재편성 지시를 받기 위해서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로 가는 김 소위 일행과 강릉에서 출발하여 대관령으로 향했다. 도중 도로 옆, 우물이 있는 농갓집에 들러서 휴식을 하기로 했다. 형의 행방불명 소식에 슬퍼하실 부모님 생각을 하며 정신없이 앞에 놓인 도로를 보고 있는데 대관령 쪽에서 야전공병대 트럭이 강릉 쪽을 향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내 앞을 지나가는 순간 트럭 뒤에 서 있는 흑 흙투성이 작업복 차림의 장교가 내 시야에 close up 되었다.


  그 순간 “형! 민 소위님! 야, 헌기야!” 우리 일행은 모두가 소리 지르면서 트럭 뒤를 쫓아 나갔다.

  다행히, 정말로 다행히 우리 고함을 들은 형이 트럭을 멈추게 하고 뛰어내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 형제는 동부전선 대관령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다.


  65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대 명예교수 의학박사 민헌기는 88세로 서울에 건재하다.


  3년 전 2013년 6월에 우리 온 가족이 한국에 갈 기회가 있었다. 4박 5일의 동해안 일주를 하던 마지막 날 내가 그때 51년 5월에 그 부근에 있었던 설악산을 찾아갔다. 짙은 안개 속을 케이블카 정류장 가까이 있는 신흥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 딸 Kathy가 “Dad, there is a kind of war memorial.”이라고 알려주었다. “설악산지구 전적비”가 안개 속에 보였다.


설악산지구 전적비2.jpg


“1951년 5월에 설악산 지구에 진입한 중공군과 인민군을 반격, 격퇴한 국군 1군단 산하 11사단과 수도사단의 전적을 기념한다.”는 짧은 비문을 읽으면서 설악산 넘어 대관령 산속에서 있었던 젊었을 때의 우리 형제의 상봉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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