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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 여호와는 속 마음을 보느니라”

김 홍 식


  대다수 이곳 라구나우즈에 사시는 분들은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것을 이룬 분들로 보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씀대로 ‘우리 그 ‘목숨’도 잃지 말고 성공합시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소위 모태 교인으로 태어나고 보니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평생을 착하게 살아야 하고 또 착한 척해야 하는 분위기에서의 생활을 해 왔었던 것 같습니다. 의과대학 시절 김성희 교수라는 당시 한국 정신과 계의 거물이셨던 분에게 정신과를 배웠는데 강의가 너무 어렵다하여 싫어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분의 강의가 좋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일요일마다 교회라는 곳에 가서 위선이라는 옷을 겹겹이 덮어쓰고 오면 평일엔 학교에 와서 그분의 강의를 통해 그 옷들을 하나하나 벗게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질병들이 심리적 요인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배워서 잘 알고는 있었지만, 내과 의사로서 오랫동안 환자들을 대하고 보니 ‘거의 모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임을 느끼게 되었으며 또 실질적으로 내과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 거의 없다는 현실에 실망감을 느껴 그후 정신과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절대적 진리로 생각해 왔던 내가 속한 ‘기독교’라는 조직이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보니 유치하다며 경멸했던 미신과 다를 바 없는 집단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쉽게 기독교를 버릴 수는 없는 복잡한 가정 배경 때문에 오랜 기간의 고민과 방황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독교’와 ‘성경’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Back to the Bible’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단 방황은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사람의 외형은 보지 않고 속마음만을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리한 눈으로 하나님은 나의 외형 아닌 속마음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요 성경이라는 책은 단순히 사람 눈에 보이는 선행을 독려하는 윤리 도덕이나 종교의식의 교본이 아닌 어느 심리학 교과서보다도 훨씬 더 예리한 눈으로 나의 양심을 꿰뚫어 쪼개는 책이라는 것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미국 생활에서 역시 가장 어려운 것은 언어 문제였습니다. 일반 환자와의 대화는 그런대로 통할 수 있었는데 인생문제를 얘기해야 하는 정신과 영역의 대화에는 거대한 장벽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살을 고민하며 도움을 바라고 찾아온 어느 여대생의 심각한 대화를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를 보면서 먹고 살기 위해 평생을 이 짓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양심에 도저히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아 정신과 개업은 포기하고 그 이후 평생을 다시 내과 의사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내가 공부했던 정신과가 돈벌이에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덕분에 평생에 걸쳐 나 자신의 내면을 보는 또 하나님이란 분의 마음을 읽는 눈을 가지게 해준 것입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일개 정신과 의사도 사람을 볼 때면 외형 아닌 마음만을 분석하여 보는데 하물며 하나님이라는 분이 어떤 관점으로 나를 보실까 하는 것과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인간의 ‘죄 문제와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임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 자신의 상태를 보게 된 것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착하게 살려는 종교생활만을 열심히 하고 있었지 핵심인 죄 문제 해결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대화 도중 “건강한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즉 병이 없으면 의사가 필요 없듯이 예수는 죄인에게만 필요한 분인데 너 진정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느냐 하는 지적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야 누구나 죄인이라는 것은 얘기하고 있었지만 착하다고만 생각했던 내가 이론이 아닌 진정으로 죄인임을 인식하는 데까지는 또다시 오랜 기간의 처절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죄인이 아니라면 예수가 필요 없는 데 필요 없는 예수를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은 모순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성경공부를 하던 중 믿으려고 그토록 노력해도 안 되었던 내가 죄인인 것과 예수의 피가 내 죄를 깨끗게 하셨다는 것이 참으로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1977년 9월 17일의 일이었는데 그것이 믿어지게 된 순간 이후의 나의 인생관, 가치관, 생의 의미와 목표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처럼 위선적인 죄인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 심리학 공부를 다른 환자 아닌 나 자신에게 응용했던 덕분임을 알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에서의 외모란 단순히 신체적 외모만이 아닌 ‘정신적 외모’도 포함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나 효도에도 ‘외모’가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을 또 부모를 그토록 사랑하고 효도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요’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당사자인 나의 심정이 어떠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스러우니까 사랑하는 순수한 것이어야지 율법에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정신과 의사까지 동원 않더라도 시골 어머니도 다 아는 사실인데 내가 이런 식으로 ‘외모’적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는 말씀은 의무감으로 하는 이런 ‘외모’적 행위는 계산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외모’라는 단어를 ‘거래’로 바꾸어 보면 그 뜻이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효도나 부부 사랑이나 신앙생활이 순수한 사랑 때문인 것 이외의 ‘~때문에’라는 거래성이 있다면 ‘외모’로 하는 것이라고 판단해도 될 것 같습니다. 유산상속을 의식한 효도라면 참 효도가 아니듯이 내가 하는 신앙생활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의무감, 이러다가 책망 받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피곤한 몸  이끌고 이렇게 열심히 하면 잘 봐 주시겠지 하는 거래성, 내 열성이 부족한 것을 cover 하려는 보상심리의 ‘외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참 신앙생활로 보실까 하는 것입니다.


  자살폭탄 회교도들이 그렇게 순교하면 하늘나라에 몇 명의 처녀를 얻을 수 있다는 ‘거래’ 때문이듯, 내가 했던 종교적 열심들이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님께서 잘 봐 주시겠지 하는 거래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식에게 바라는 ‘효도’는 ‘마음’이지 ‘외형’이 아니듯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생활이 무엇일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 부모로서의 내 입장에 대입시키면 쉽게 알 수 있게 됨을 정신과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식이 내게 효도한답시고 일요일마다 정장 차려입고 일정한 장소에 와서 큰 절하고 가는 것을 나는 ‘효도’로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외형이야 아무렇든 상관없고 부모인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해 드리려는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뿐입니다.


  이 두꺼운 성경 내용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를 표현하는 핵심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선고 받고 일주일 후면 교수형 당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랑’은 맛있는 음식, 좋은 집, 거액의 현찰, 박사 학위가 아니요, 누군가가 무죄로 만들어 주는 노력을 해주는 것뿐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즉, 어떤 육신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지옥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없다면 참사랑이 아니라는 계산법을 보는 눈을 갖도록 해준 것이 정신과 공부의 덕분입니다.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하나님이라는 분을 유치원 학벌도 없는 시골 어머니의 위치에만 놓아도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파나 외형적인 종교의식 같은 것은 사람인 나의 심리적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는 필요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전혀 무의미함을 보게 되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대로 ‘종교’에 메이지 않는 신앙 생활하게 해 주신 것도 ‘외모를 보지 않는’ 정신과 공부 덕분이었기에 그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했기에 누구든지 만약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잃었던 생명 찾았고……”의 ‘목숨 찾은’ 감사가 아직 없었다면 왜 나에게는 없을까 의문을 가지며 외적인 ‘종교 행위’ 아닌 속 ‘양심’만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맞추어 찾으려는 노력 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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