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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우산

김 일 홍


  내가 그녀와 첫 만남은 무교동 골목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카페 <남과 여>라는 곳이었다. 우리 세대가 살았던 그 당시 무교동은 낙지 골목이었다. 막걸리 친구들이 몰려들어 북적거렸던 곳, 그런데 어쩌다 어울리지 않게 골목 끝자락에 <남과 여>라는 음악이 있는 카페가 있었다.


  대학 후배의 소개로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친절하게도 분위기가 좋다며 만나는 장소까지 정해 주었다. 카페 안은 어두웠다. 천장에 박혀 있는 수명을 다한 전구의 불빛이 졸고 있었다. 천장 한가운데는 삐거덕 거리며 네온이 빙빙 돌고 있었다. 삼류 카바레의 불빛 같았다. 좁은

공간에 테이블 몇 개와 소파가 엉성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음악 하나는 끝내주었다. 이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손님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늦은 봄비, 살랑거리는 바람에 뿌리는 빗발이 얼굴에 촉촉이 흘러내렸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맛 나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듯 “시인과 농부”의 선율이 가슴으로 스며들어 왔다.

한가한 농촌들에 멍청히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두리번거리며 앉을 곳을 찾았다. 마침 빈 테이블이 있어 젖은 우산을 옆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미지의 여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흥분되었기 때문이리라.


  후배 말로는 그녀가 노처녀이기는 하지만 상큼하니 잘 사귀어 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둘은 혼기를 넘긴 노총각, 노처녀였다. 그녀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들어왔다. 곧바로 내가 앉은 자리로 다가와 스스럼없이 테이블 앞 의자에 앉는다. 그녀도

비에 젖은 우산을 접어 걸상 옆에 놓는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간단하게 머리 인사를 했다. 그녀는 수줍어하지 않았다.


  ‘시인과 농부’가 끝나자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비가 오는 날 아버지에게 새로 산 우산을 드렸는데 그만 우산을 술집에 놓고 오셔서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몹시 아까워 아버지를 핀잔했는데 우산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랬는지 후회스럽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니 별일들이 다 후회스럽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한다. 나는 할 말이 없어 듣고만 있었다.


  말주변이 없다 보니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낙제점은 면하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만 말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나올 때였다. 나는 흥이 솟았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출렁였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그녀에게 춤을 출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춤을 좀 춘다고 자랑을 했다.

그 나이 되도록 춤을 못 춘다니 말이나 되느냐는 듯 지껄였다. 나는 대학 친구 중에 춤꾼이 있어 그 친구한테 춤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초면에 헛소리도 이만저만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처음 만나는 여자 앞에서 엉뚱하게 춤 이야기는 왜 했는지, 그녀의 눈빛이 사각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아차 했다. 그러자 카페 안은 ‘베토벤의 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선율은 나의 가슴을 두들겼다.

  “재미 좋았겠네요.”

  그녀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씁쓸한 웃음을 삼켜야 했다. 우산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나의 춤 이야기는 어처구니없게도 맥이 통하지 않았다. 어색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음악이 있고 그녀의 독특한 체취가 나의 미각을 싱그럽게

해 주었다.

  그녀는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눈이 커 보였다.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안경 속 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유난이 아롱거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맥주 500cc들이 두 잔을 주문했다. 컵 속에 담긴 맥주는 퇴색한 조명 아래 여러 갈래의 보석 색깔로 변하고 있었다. 맥주 컵에 수북이 쌓인 맥포가 불빛에 명멸하고 있었다. 맥포가 꺼져가면서 보리 빛 색깔이 부상하고 있다. 우리는 컵을 들어 입맞춤을 했다. 짜릿한 맛의 알코올

이 입가에 맴돌았다. 맥주 맛이 좋았다.

  “음악을 안주로 하니 술맛이 좋네요. “

  그녀가 술꾼처럼 한마디 한다.

  “술은 분위기에 따라 다르지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시인처럼 술을 마시는 것이지요.”

  나는 말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시인은 술 마시는 게 별다른가요?”

  그녀의 눈웃음에 나는 또 아차 했다.

  “시인은 시적으로 술을 마시지요.”

  나는 능청을 떨었다.

  “시적이 뭔데요?”

  그녀는 농으로 말했다. 시적이 무엇인가 신통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게 말하자면 현실을 떠나 미래를 꿈꾸는 것이지요. “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응시하며 웃는다. 그 웃음이 순진하게 보였다. 그녀는 나를 좀 어리어리하게 보았으리라. 밖에는 비가 세차게 뿌렸다. 손님이 들어오는지 문을 여닫는 순간 빗소리와 음악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오늘 만남에서 본론으로 슬슬 들어갔다. 먼저 그녀가 말을 했다.

  “무얼 하세요? “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 같은데 성큼 말하기가 곤란했다. 나는 내 본래의 직장을 숨기고 살아왔다. 직장의 이름도 여러 가지였다. 필요에 따라 바뀌었다. 신문사 기자도 되었다가 재벌회사 과장 정도로 변했다.

그녀를 소개한 나의 후배도 내 직장을 모르고 있었다. 그 후배는 나를 신문기자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분위기에 따라 직장 이름이 달랐다. 그런데 오늘은 본업을 말해야 하는가 고민스러웠다. 그녀에게 먼저 직장을 물었다.

  “직장은 어디시죠?”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물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농촌 진흥청인데요.”

  “수원에 있는?”

  “그래요, 얼마 있다가 아프리카로 떠나기로 했어요. UNICEF 요원으로.”

  “그럼 얼마나 있다가 오시는지?”

  “모르지요, 늙어서 올지.”

  “결혼은 안 하구요?”

  “결혼할 사람이 있어야지요.”

  우리는 결혼을 탐색하러 여기 왔는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이 흘렀다. 이제 내 차례다. 어떻게 말을 할까. 솔직히 고백을 할까.

  나는 “저어 저어.” 했다.

  “왜 무슨 죄를 지었나요?”

  그녀는 눈을 치뜨고 나를 응시한다.

  “제 직장은 무서운 뎁니다.”

  “직장이 무서운 데 있고 안 무서운 데도 있나요?”

  “네, 무서운 데 있습니다.”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딴전을 피우더니 “남산?”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

  “뭘 어떻게 알아요?”

  그녀는 딴청을 피웠다.

  빈 잔의 맥주 컵을 바라보다가 다시 500cc 두 잔을 시켰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대화를 망각했는지 엉뚱한 말을 했다.

  “인연은 전생의 만남의 연장일까요?”

  “글쎄요.”

  나는 시무룩했다. 그러면 우리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네온이 빙글빙글 그녀의 얼굴을 지웠다 살렸다 하면서 돌아간다.

  그때 나직한 소리 ‘드보르자크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꿈속의 고향, 고향의 냇가에서 발가벗은 개구쟁이들이 물장구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빗속을 걸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버스 정류장에 섰다. 불광동 버스가 왔다. 그녀는 날름 버스에 타고 우산을 흔들었다. 아무런 약속 없이 버스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Going Home’의 음률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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