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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9 15:55
‘50년전 경제부흥의 초심’에서 배운다 - 박정희 통역관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
“당초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갑자기 취소해 버리고 만 거였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
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정부에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일제강점기 때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제3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에게 부탁하여 함께 서독으로
날아갔다. 최 전 사장은 독일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백 원장 일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비행기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 운을 뗐다.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1964년
12월 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여객기(보잉 707)가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했다. 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다.”
대통령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타는 상용 노선에 취항 중이던 비행기에 급히 타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해외 경험이 없었는지는 비행기에 동행했던 조선일보 정치부 이자헌 기자의 회고 (‘파독 광부
45년사’)에 잘 나와 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1등석에 타고 다른 일행은 이코노미석에 탔다.
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용도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로 포함됐던 한국일보 정광모 기자가 ‘물비누’라고 설명해 줘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기자들도 국제적 촌놈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였다. 기내의 박 대통령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 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서독의 광부들 때문이었다.
백 원장의 설명이다.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TV에 방영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28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1964년 12월 5일 대통령과 총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백
원장은 그날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보여 준 박 대통령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당시 마흔일곱이던 박 대통령은
서독 총리를 앞에 놓고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총리의 질문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우선 잘살아야 한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듯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낸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년)로 재임하고 있던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에게 ‘모두를 위한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독일 경제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다음 날은 박 대통령이 독일의 한 공과대에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독일 사람은 교수가 강의하러 들어오면 박수 대신 주먹으로
책상을 수차례 가볍게 두드리는데
사전에 이 이야기를 미처 대통령께 전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가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야유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통역관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 양반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했는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학생들이
또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아. 무시가 아니라 경청의 의미구나’ 하고 눈치 채고는
안심하고 원고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웃음).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박 대통령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
창피당할
뻔했다’고 농담조로 핀잔??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한국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학생들에게 했던 연설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강의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광부들의 얼굴엔 온통 석탄이 묻어 있었고 작업복 역시 흙투성이였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여 명의 광부 등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연주가 끝나자 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했다.
서독에서 머문 일주일(7∼14일) 동안 박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나치 정권하에서 총연장 1만4000km를 목표로 건설하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3860km를 완성시켰던 ‘아우토반’은
박 대통령이 방독할 무렵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로 유명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의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 비용과 건설 기간, 건설 장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결국 3년 뒤인
1967년 11월 7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하며 직접 진두지휘까지 하기에 이른다.
백 원장은,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박정희’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경험이 나의 평생 삶을 이끌어 준 나침반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박 대통령을 보며 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중간쯤 자동차를 전부 세우더니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육 여사도 서독 방문 내내 눈물을 훔쳤다. 남편 때문에 울고 광부와
간호사 때문에 울고.”
백 원장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박 대통령 혼자가 아니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경제 발전도 없었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국제시장"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나왔는데, 위의 글을 읽으면서 또 눈물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