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을 대표하는 독일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과 조선의 국왕은 양 제국의 지속적인 우호관계와 양국 국민들의 편안한 통상 교류를 위해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한·독 관계의 첫 번째 교량이 되어 준 한·독 통상조약의 시작문구이다. 2013년은 한·독 통상조약 체결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과 통상 교섭을 하려던 최초의 외교적 시도는 막스 아우구스트 스키피오 폰 브란트(Max August Scipio von Brandt)에 의해서였다. 그는 1862년에 부임한 최초의 주일 독일영사였다. 1870년 폰 브란트는 부산에 건너와서 통상 교섭을 시도했지만 조선 관리들로부터 거절당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1873년 유럽 강국들에 대해 배척적이었던 대원군의 하야와 1876년 조·일 수교 이후의 개화정책에 힘입어 폰 브란트는 1882년 (당시 그는 주청 독일공사였다) 조선 황실과 독일 간의 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독일 정부로부터 너무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비준을 얻지 못했다. 독일 제국은 주요꼬하마 총영사인 칼 에두아르트 차페(Carl Eduard Zappe)를 내세워 새롭게 협상을 시도했고, 조선에서는 1882년 말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고문으로 부임한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가 협상자로 나섰다. 이들은 곧 수정된 조약에 합의할 수 있었다. 마침내 1883년 11월 26일 민영목 외무독판과 칼 에두아르트 차페 총영사 간에 조·독 통상우호항해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으로 조선과 독일 제국 간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수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양국은 서로 상대국에 영사관을 상설하기로 했으며, 조선은 독일 제국과의 통상을 위해 조선 항구를 개방하고 독일인들이 항구 주변에 토지나 건물을 구입하거나 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정 구역 내에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로 했다. 또한, 독일과 조선 사이의 해상무역에 관한 사항이 규정되었고 관세도 확정되었으며 양국 국민들이 공부를 목적으로 상대국을 방문할 시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기로 했다.
1884년 11월 18일 비준서를 교환한 후 독일 제국은 서울에 총영사관을 개설했고 비준서 교환을 위해 서울을 찾았던 오토 챔브쉬(Otto Zembsch)를 초대 총영사로 임명하였다. 1903년 총영사관은 공사관으로 승격되었으며 콘라드 폰 잘데른(Conrad von Saldern)이 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 당하자 독일과 조선의 외교관계는 중단되었고, 주한 독일공사관의 업무는 주일 독일공사관에 위임되었다. 조선 정부는 1887년 9월 이래 수명의 주독 전권대신을 임명했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1901년이 되어서야 민철훈 주독 전권공사가 처음으로 부임했다. 주독 공사관도 이범진 공사를 마지막으로 1905년 폐쇄되었다.
일제치하,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국토 분단 이후 독일연방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신뢰를 바탕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파독 광부•간호사
1963년 12월 7일, 16일
2013년 12월이면 한국과 독일 정부가 한국의 젊은이들을 서독 광산으로 파견하는 협정을 체결한지 50주년이 된다. 1977년까지 8천 여 명의 한국인이 광부가 되어 독일 지하에서 노동을 했고, 이들의 뒤를 이어 1만 여 명의 한국인 간호사가 독일 병원으로 파견되었다.
1960년대에는 독일 광산의 인력 수요가 컸는데, 독일은 한국 광부들을 통해 인력 부족 현상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이른바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 고용계획’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 차례 문서교환이 이루어진 후 1963년 12월 7일, 16일 협정이 발효되었다. 이 협정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독일이 유럽권 밖의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협정이었던 것이다.
양국 간의 이와 같은 합의는 당시 자금이 필요했던 한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독일로 파견된 인력들이 한국으로 돈을 송금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이 협정으로 인해 또 다른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약 30%에 육박하던 한국의 높은 실업률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의 광부협정은 커다란 기회였다. 게다가 당시 해외 출국 규제가 엄격했기 때문에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원율은 매우 높았다. 100여 개의 자리에 최대 2,500명이 몰려들었으며,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자가 60% 이상이었다.
독일은 당시 광부뿐만 아니라 간호사도 필요로 했다. 독일의 여러 수도회와 한국 내 독일 가톨릭 교회는 1950년대 말부터 이미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파견을 중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부협정에 상응하는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에 관한 공식 협정은 1971년 7월 26일에서야 비로소 체결되었다.
한국인 광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간호사들 역시 독일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다. 이들은 전문적이고 친절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고용계약도 연장되었다. 몇몇 간호사들은 한국인 광부들과 결혼하기도 했고, 한국에 있는 남편을 독일로 불러오기도 했고, 독일인과 결혼하기도 했다. 3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한국 간호사의 절반 이상이 독일에 남았다. 이들은 오늘날 한·독 우호관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간호사들과 함께 한국인 광부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동시에 이들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어 한국의 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루르 지역이나 라인란트 지역에 살고 있다. 이들은 독일 최대이자 서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한국 교민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현재 독일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독일 사회통합의 모범적인 사례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