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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4 13:18
안개 낀 어느 아침에
이 혜 규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요?”
뿌연 안개가 온 동리를 촉촉이 덮어주던 이른 새벽, 집 앞을 서성거리던 신사가 산책하는 나에게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다. 점잖고 인품이 있어 보이는 80대 초반의 노신사였다.
“오늘은 월요일이에요, 7월 21일이구요.”
나는 친절히 날짜까지 덧붙여 말해 주었다. 걸어가면서도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곳은 55세 이상 되는 사람이 살고 있는 노인 촌이다. 은퇴 후 시간에 매이지 않고 여생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을이다. 시간을 채근할 필요가 없어 오늘을 잊었을까. 오랜만에 자녀들이나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깜박 시간을 놓쳐 버렸을까? 인상도 좋고 예의 바른 노신사가 시간을 잊다니… .
시계 속에 초침을 한 초도 돌릴 수도, 잡아맬 수도 없는 흐름 속에 이곳에 이주해 온지도 10년이 지났다.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도 길었던 시간들이 빠져나가는 시간은, 것 잡을 수 없이 빠르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돌아와 다시 보면 언제 다가왔는지 내일이면 또 하나의 일요일이다.
이곳 산책길은 우리 집을 시발점으로 언덕을 뺑 둘러 조성된 3.5마일 정도가 되는데 걷기에 오십 분 정도가 걸리는 아름다운 길이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집들은 각 다른 모양으로 집주인의 개성을 보여준다. 장미, 버드 파라다이스, 데이지, 라벤더 등 철 따라 피는 꽃들의 향기가 일 년 내내 산책객들이 깊은 숨을 들여 마시게 한다.
라구나우즈 이 마을이 형성된 지 50년이 된다. 새들은 자기들의 보금자리 인양 늦잠 자는 친구를 깨우는 목청을 가다듬고, 깊은 산에서나 들을 수 있는 머슴 새의 꾸욱-꾹 꾸욱-꾹 응답 없는 부름은 밤새 외로웠다고 토하는 듯 애절한 울림을 준다. 하루의 시작인 새 아침, 토끼들은 하얀 꼬리를 쳐들고 할 말이 있는 듯 크고 까만 눈을 깜빡인다. 어둠 속에 깨어난 뱁새나 풀벌레들도 자리를 털고 아침 인사하기에 바쁘다.
이런 아침 축제에 동참한지도 두 해가 지났다. 나이가 들어가며 건강하던 몸도 마모가 되는지 여행 갔다가 주저앉았던 아픈 기억들이 있다. 노인성 관절염이라는 어쩔 수 없이 얻어진 병명이었다. 하지만 인술의 발달로 무릎에 이식 수술을 받고 통증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수술을 받는 동안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내가 디딜 수 있는 발걸음!
육중한 지축을 짚고 힘껏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이 아침! 삶은 아름다움이라고 크게 외치고 싶은 충동,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뛰었다. 사십 년 이민생활을 책은 고사하고 신문 한 장도 집어 보지 못했다. 가슴을 흔들어 놓을 많은 이야기들이, 은퇴 후에 시간을 쪼개어 음미할 수 있는 보고가 책장에 차곡차곡 쌓여 나를 기다린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린다. 갑자기 나타난 컴퓨터가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컴퓨터를 모르면 마켓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어떤 친구는 “컴퓨터가 나오려면 일찍 나오던 가, 우리가 죽은 후에 나오지, 왜 우리를 기죽게 하느냐는” 불평을 한다. 세대 차이를 탓하는 친구도 있지만, 어떤 친구는 젊은이 못지않게 손안에 든 작은 요술 방망이로 우주 촌에 일어나는 모든 정보와 지식을 즐긴다. 컴퓨터에 대한 기본 교육을 받지 않았던 우리 세대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포기할 수만은 없는 넘어야 할 과제인 것 같아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노인이 되면 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럴까? 남아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싶어 잠을 줄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흘러가는 시간을 잠으로 놓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달력에 일정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다. 은퇴한 백수는 죽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며 불평 아닌 환성을 지른다. 줄지어 이어지는 스케줄 따라 살다 보면 하루나 일주일, 그리고 한 달과 일 년이 나도 모르게 훌쩍 지나간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 지금 며칠이며 몇 주일인지 헤아리다 놓칠 만큼 뿌듯한 하루를 보냈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던 노인도 그렇게 살아가는 분이 아니었을까? 시간을 쪼개 음미할 수 있는 삶의 보고 상자에 취해 사느라 노신사는 오늘을 잊었는지 모르겠다.
자욱한 안개가 걷혔다. 이렇게 건강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것이 축복임을 깨닫는다. 병상에 누워 두발로 걸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던 내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다. 따스한 기운이 온 누리에 가득하다. 후회 없는 오늘이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