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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이 되기까지 (4편- 마지막)

    임종덕은 그동안 모택동을 다섯 만났고 당시 중국 총리였던 주은래와도 여러 차례 만났으며, 특히 임종덕의 하나의 이름인 임성래란 이름도 당시 주은래가 작명을 해줄 만큼 주은래는 임종덕을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었다.

    한편 미국 탁구 선수단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를 순방하면서 탁구 경기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미 1971 키신저의 중국 극비 방문에서 합의한대로 닉슨 대통령은 1972 2 중국을 공식 방문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세계 역사는 이때를 서로 적성국가였던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 탁구 외교가 양국간 수교의 징검다리의 출발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 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 경기만이 중국 정부와 국민들의 거부 반응이 없었다. 불과 2.5g 가볍고 작은 탁구공이 미국 중국간의 외교 관계를 성사시키는데 일등공신이요 이야말로 노벨평화상 감으로 전세계를 흥분시겼다.

    <미국 LA 이민 교회 창립에 나선 임종덕>

    임종덕은 미국 LA 출장중에 우연히 한국에서 목사의 부흥회 장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설교를 하는 목사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사람이었다. 바로 1953 임종덕이 열다섯살 소년때 서울 여의도의 미공군 교회 주일예배때 한국 공군 장병들에게 설교를 했던 당시 공군군종감이 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 장군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임동선 군종감의 설교에 감동했던 임종덕은 20여년만에 이곳 부흥회에서 다시 만났다. 두사람은 그때 주일예배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임종덕은 임목사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70년대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것인데, 이들을 위해 빨리 이민교회를 만들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1970년에 오늘의 LA 동양선교 교회가 창립되었다. 동양선교 교회는 미국으로 이민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낫선 타국땅 이역에서 서로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하여 성도 수가 한때는 8천명에 달하는 미국의 한인교회중에 가장 교회가 되기도 했다.

    한편 임종덕은 주일날만 되면 LA 있는 동양선교 교회에서예배를 드리기 위해 워싱턴에서 LA까지 거리를 왕복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국가 공무로 국내외 출장이 잦은 관계로 주일마다 LA까지 가는 교회 출석이 쉽지 않았다.

    교회 창립 5주년이 되던 1975 동양선교 교회는 교회창립의 맴버였던 임종덕을 장로 추대에 나섰다. 이때 임종덕은 과연 자신이 장로가 될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장로 후보자의 필독서로 알려진 이판석 장로의 <장로학> 이성봉 목사의 <장로란>두권의 책을 밤을 세워가며 여러번 깊이 탐독했다. 결론은 아직 장로로서 직분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장로 추대를 사양했다.

    한편 자신과 함께 일했던 헨리 키신저 외교안보 보좌관이 국무장관이 되면서 , 외교관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임종덕은 1974년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날을 맞이했다. 그의 양아버지였던 화이트 장군이 83세로 소천했다.

    서울역에서 소매치기와 절도행각을 했던 자신을 오늘이 있기까기 키워준 아버지의 위해했던 일생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임종덕은 하루종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많이 울었다. 화이트 장군은 아들 임종덕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켜준 하버드 대학교와 또한 자신의 모교인 미공군 사관학교에 유산을 기중했다.

    <백악관을 떠나야만 했던 임종덕 대령>

    핑퐁외교 탁구 친선경기로 시작된 ,중국간 외교는 드디어 1979 양국간의 국교가 수립됨으로서 임종덕의 중차대했던 사명도 끝났다. 그러나 임종덕은 계속해서 닉슨, 포드, 카아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으로써 세계 각국의 정보를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한편 임종덕의 백악관 근무에 생각지도 않았던 시련이 닥아왔다.

    카아터 대통령이 주한 미지상군을 4,5 사이에 완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버 소장이 기자회견에서 철군 반대를 주장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1977 5 17일자 워성턴 포스트지와의 대담에서지난 1년간의 집중적인 정보 활동결과 북괴의 군사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철군 결정자들은 북괴의 군사력에 대해, 2,3년전 낡은 정보에 근거를 두고 철군을 할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카아터의 철군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상과 같은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대담 기사가 나간지 이틀 5 19 카아터 대통령은 크게 분개하여 싱글러버 장군을 즉각 소환하라고 브라운국방 장관에게 명령했다.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자신에게 철군 반대에 대해 직접 보고 하라고 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UN 수석대표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서열에서는 3인자의 위치였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 주둔 미군 장성을 소환한 것은 1951 6.25 전쟁때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소환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종덕은 당시 카아터 대통령과 싱글러버 장군과의 대담 내용은 밝힐 없다고 했다. 한편 카아터 대통령은 싱글러버 장군을 주한미군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 어느날 임종덕을 불러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 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 보시고”라고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평소의 생각대로 말했다. 4만여명의 주한 미군이 있으므로 북한이 전쟁도발을 하지 못하며 대신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 임종덕이 카아터에게 정면으로 강력하게 제시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백악관을 떠나야 계기가 되었다.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카아터 대통령은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친 도망병들을 전부 사면하라고 지시했다. 지시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자 임종덕은 카아터의 사면 지시를 반대한다고 했다. 자신이 월남전 참전용사로서 전투중에 자기만 살겠다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장병에게 대통령이 사면을 한다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바쳐 전투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임종덕의 반대 의견을 듣던 카아터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임종덕은 대령에서 장군 진급을 불과 두달 앞두고 있었는데, 자신도 앞서 싱글러버 장군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임종덕은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결레가 되는 처신을 없기 때문에 그는 자진해서 대통령에게 대통령 안보비서관 직에서 다른 군부대 전근을 건의 했다.

    그리하여 임종덕은 미국의 어느 예비군 부대의 심리전과 창설 임무를 받고 백악관을 나섰다, 정든 백악관을 나올 그는 번이나 뒤를 돌아 보면서 그의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텅빈 교회안에서 그는 모처럼 하나님께 시간의 감사 기도를 있었다. 임종덕은 1986 육군대령으로 예편하면서 LA동양선교교회 장로 장립을 받았다.

    현재 부인과 함께 LA 살고 있으며 슬하에 딸만 셋을 두고 있는데 딸들에게 학생시절 조국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서울 정신여고에 청강생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고국에 때마다 서울역을 찾아간다>

    서울역은 임종덕에게 평생을 두고 잊을 없는 고향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때마다 서울역을 찾아간다. 서울역앞 광장을 넋을 잃은 듯이 보고 있는 동안 임종덕의 머리에는 61년전 14살의 전쟁 고아로 배고팠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밥을 얻어먹지 못할때는 종로구 내자동의 무물가를 찾아가서 물배라도 채우겠다고 샘물을 꿀꺽 꿀꺽마셨다. 어느날 허기에 지쳐 우물가에 힘없이 누워있던 임종덕에게 외국 신문기자가 와서 영어신문 장을 펴서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없지만 임종덕 자신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신문에 자신의 모습은 너무 배가 고파서 두레박으로 물을 올리던 할머니에게 물을 얻어 먹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후일에야 알았지만 사진은 미국의 타임즈 기자가 찍은우물가의 소년”이란 기사로 당시 너무나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 기자상을 수상했던 사진이었다.

    한편 서울역 광장은 당시 임종덕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활의 근거지요 직장이었다. 15살의 나이에 수십명의 흘리게 전쟁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의 눈은 항상 돈과 귀중품을 가진 사람만 노리고 있었다.

    15 소년 임종덕의 소매치기와 절도 기술은 그야말로 귀신도 놀랄 정도었다. 매일같이 진행되는 소매치기와 절도의 순간적인 기술의 승패는 바로 임종덕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어린 고아들의 생사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아예 순간의 실패란 감히 생각도 없었다.

    당시 서울역에서 절도 사건이 터지면 형사들이 제일먼저 임종덕을 지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임종덕은 지금도 1년전 이곳 서울역 광장에서 양아버지와의 그날의 인연은 바로 하나님이 맺어준 것임을 천번 만번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께서는 임종덕으로 하여금 미국 5공군 사령관인 3 장군의 가방을 훔치게 하여 임종덕을 장군의 양아들로 입적 시키기 위한 바로 하나님의 완벽하고 빈틈없는 시나리오였다고 굳게 믿고 있다. 만일 그날 하나님께서 그날의 인연을 맺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영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교도소를 평생토록 드나들며 70평생을 폐인으로 망쳤을 것이라고 했다. 임종덕이 서울을 방문하면 서울역 이외에도 앞서 언급했던 굶주린 배를 물배로 채워줬던 내자동, 그리고 양아버지와 함께 난생 처음 교회를 나갔던 여의도를 가본다.

    그러나 그때의 내자동 우물터와 여의도 비행장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고층 빌딩들은 뉴욕의 맨하탄을 방불케 한다. 6.25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던 당시 서울 거리는 넝마주의 소년들과 거지들이 줄을 이었고 () () 나라 산천을 휩쓸었다.

    올해(2011) 75세인 임종덕도 바로 시대에 불쌍한 고아였다. 자신 혼자도 먹고살기 힘든 난리판에 소매치기와 절도로 어린 고아들을 먹여 살리던 임종덕을 하나님은 결코 무심치 않았다. 이말은 바로 하나님은 남을 위해 스스로 돕는자를 도와 준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한편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최고 두뇌들만 일할 있는 백악관에 그것도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으로 등용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임종덕은 강조했다. 서울역 광장은 임종덕 인생에 너무나도 창피스럽고 또한 슬픔과 눈물의 기억만 있어 두번 다시 찾을 곳이 못되지만 그래도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첫사랑을 받은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르는 찬송이 404장이라고 하면서 필자와의 대담을 마쳤다.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기록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어찌다 쓸까. 저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못하여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

    후기어느 웹페지에 올라온 4 편의 글이었다. 발표한 분에게 내가 그의 고교후배이며 동시에 6.25 사변 서울에 살던 소년이었다는 것을 밝혀서 별도 이메일로 얻어낸 재료임을 알린다.- 禪涅槃-

  • p.s.  Thanks Zen for the providing this fin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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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의 문제의 인물 '임종덕 대령'은 이름이 임성래 또는 'Steve White'으로도 또는 'Steve 임 혹은 림'으로 미국의 극비활동 및 정보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태평양의 바람" (ISBN-10 : 893000587X | ISBN-13 : 9788930005876 255쪽)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으로도 소개되었다 합니다.

    이 소설의 저자는 김동익 (金東益)이라고... (다음은 어디서 퍼왔음:)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60년대초〈조선일보〉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해〈중앙일보〉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낸 30여년동안 시대의 빛과 어둠을 함께했다. 1980년대말~90년대초〈중앙일보〉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정무제1장관을 지냈다. 이후 건국대와 성균관대 교수로 강단에 섰으며, 용인송담대학 총장을 지냈다. 저서로는《권력과 저널리즘》,《대학교수 그 허상과 실상》,《20년 후를 보아라: 어린 소녀에게 남기는 세상이야기》,《정오의 기자》,《대통령과 미디어》(역) 등이 있다. 

    한번 이 소설책을 구해서 읽어 보길...

    다음은 이 소설의 서평을 퍼올렸음:
    <서울역 쓰리꾼에서 미국 백악관 정보분석관이 되기까지,> 
    -임성래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읽는 한국 현대사 60여년- 

    원로언론인 김동익이 본격 취재한 실명소설《태평양의 바람》은 한국 현대사의 모질고 거친 궤적을 두 발로 직접 밟은 ‘임성래’(스티브 임)의 고백을 뼈대로 한 팩션(Faction)이다. 세계 2차 대전과 해방, 한국전쟁, 4 · 19와 5 · 16, 베트남전쟁, 김대중 납치사건, 박정희와 핵개발….6 · 25로 고아가 된 임성래는 시대를 묶는 굵직한 매듭의 틈새에서 서울역 쓰리꾼으로, 미공군 하우스보이로, 미군장교의 양자로, 베트콩 포로로 전전한다. 그러나 특유의 투지와 끈기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뒤에 세계적 석학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후에 미국 백악관 중국전문 연구원이 된다.

    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이다. 한국전쟁 관련 전시, 영화 등이 속속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 원로언론인 김동익씨가 본격 취재?저술한 실명소설《태평양의 바람》이 나왔다.《태평양의 바람》은 한국 현대사의 모질고 거친 궤적을 두 발로 직접 밟은 ‘임성래’(스티브 임, 스티브 화이트)의 고백을 뼈대로 한 팩션(Faction)이다. 저자는 이 실명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실존 인물인 스티브의 진술을 듣고 참고했으며 그의 진술을 검증하기 위해 스티브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했다.
    60년 전,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주인공 임성래는 어린 나이에 고아무리를 이끄는 대장으로, 서울역 쓰리꾼(소매치기)으로 험난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미공군사령관의 서류가방을 훔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호텔의 하우스보이가 되고, 그 후 화이트 사령관의 양자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미국에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대학에 입학해 러셀, 토인비, 슈바이처 등 세계적 석학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에는 베트남전쟁에 차출되어 혁혁한 무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베트남 군에 잡혀 포로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커리어가 군인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베트남에 간 지 4년여가 됐을 때, 대학 은사인 키신저 박사의 추천으로 백악관에 입성하게 되고 동아시아 전문 정보분석관으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세계 2차 대전과 해방, 한국전쟁, 4 · 19와 5 · 16, 베트남전쟁, 김대중 납치사건, 박정희와 핵개발…. 임성래 혹은 스티브 화이트라는 주인공은 이처럼 굵직한 시대의 매듭 틈새에서, 세계사의 격랑에 휘말린다. 이러한 역사의 모짐, 어려움 등을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인 ‘태평양의 바람’으로 명명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특히 한국인으로서의 우리들은 모두 이 바람 속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티브 임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람의 아들들'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스티브 임의 이야기를 ‘팩션’으로 남기는 것은 바람 속에서, 모진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한 불굴의 인간형의 전형을 보여주려 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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