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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동주와 詩

윤동주 탄생 100주년

 박성표

2017년은 시인 윤동주(尹東柱) 탄생 100주년이다. 작년에는 윤동주 관련 책과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년 판본을 그대로 복각한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와 사촌 송몽규 이야기로 영화 <동주>를 찍었는데, 저예산 영화였음에도 100만 관객을 넘겼다. 각각의 기획도 훌륭했지만 역시 윤동주라는 인물의 삶과 시가 시대를 뛰어넘는 울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윤동주를 시인으로 기억하고 기린다. 하지만 정작 윤동주는 살아있을 때 언제나 시인 ‘지망생’이었다. 한 번도 자기 이름으로 시집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말을 누구보다 쉽고 아름답게 구사한 윤동주인데 왜 평생 시인 지망생이었을까? 그의 삶과 시를 되짚어 보자.

구김살 없던 꼬마 힙스터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주민들이 공동으로 땅을 사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쓸 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한 곳이었다. 당시 윤동주 집안은 기와집에 살만큼 형편이 넉넉했다. 어린 시절 윤동주는 심성이 착했고, 서울에서 어린이 잡지를 구독해 읽는 것은 물론 친구와 원고를 모아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영락없이 동네 문화를 선도하는 꼬마 힙스터, 구김살 없는 착한 도련님 인상이다.

도련님 같은 인상은 1931년 용정으로 이사하면서 조금씩 흐려진다. 윤동주 아버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사업에는 서툴어 가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윤동주 자신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등을 거치며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꾸준히 시를 쓰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교내 축구선수나 농구선수로 뛸 만큼 활동적이기도 했다. 옷매 맵시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당시 그의 시를 보면 요즘 말로 ‘중2병’에 걸린 듯 허세를 부린 티가 났다. ‘제물의 위대한 향내’, ‘황금, 지욕의 수평선’, ‘그윽한 유무’ 등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한자어가 난무했다. 그러다 1935년 윤동주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터진다.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술가락>으로 콩투 부문에 당선된 것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특별한 인연으로 엮인 존재다. 둘은 성격도 정반대에, 활동 방식도 달랐지만 늘 함께였다. 이후 대학도, 일본 유학도 함께 갔다. 윤동주는 문학보다 독립운동과 이상 사회 건설에 더 큰 뜻을 품은 송몽규가 자기보다 먼저 공식적으로 ‘문인’이 된 것에 질투를 느꼈다. 당시 윤동주가 송몽규를 두고 “대기는 만성이다.”라며 벼렸고, 자기 시에 완성한 날짜를 기록하며 정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라 한다.

윤동주 리즈시절

문학에 뜻이 있고,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문과에 진학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 아버지가 반대한다. ‘문과를 나와봐야 기껏 신문기자밖에 되지 못하니 생활을 위해 의대를 가라’라고 하신 것. 윤동주가 아버지의 뜻에 강력히 반대하고, 급기야 외박까지 하자 결국 아버지도 허락하고 말았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다니던 때 가장 창의력이 넘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작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십자가> 등이 모두 이때 쓰여졌다. 원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의 시를 묶어 한정판으로 출간하고자 했다. <서시>도 이 시집의 서두에 넣기 위해 썼다. 하지만 스승 이양하 교수가 만류했다. 태평양 전쟁까지 터지며 한층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 제자의 안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인 지망생’으로 남아야 했던 이유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윤동주에게 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권했다. 윤동주는 1942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그해 10월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영문과로 편입한다. 도시샤대학에는 정지용 시인도 공부한 적이 있어서 교내에 두 시인의 시비가 마련되어 있다.

너의 귀뚜라미

그러나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 간지 고작 1년 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함께 유학 온 송몽규가 일본 경찰의 중요 사찰 대상이었던 것이다.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차표까지 예약한 상태로 체포됐다. 이때 일본에서 쓴 시와 산문 원고를 모두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쓰여진 시> 이후 윤동주가 무슨 글을 썼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송몽규와 윤동주가 조선 민족정신을 유학생 사이에서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사상범으로 독방에 수감 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고작 반년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영혼의 짝이었던 송몽규 역시 얼마후 감옥에서 숨진다. 윤동주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와 시체를 인도받고 화장한 후 뼛가루만 담아 북간도로 돌아왔다. 고작 29세의 짧은 생이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형무소에 수감된 윤동주와 매달 초순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한 번은 “붓 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썼다. 윤동주가 답장하길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 하였단다. 편지는 당연히 일본 경찰이 검열하여 먹으로 지워진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다.

나라 잃은 청년이, 이런 시기에 문학을 공부하고, 시를 쓰겠다고 창씨개명까지 하며 일본까지 건너갔다 체포되어 독방에 하루종일 홀로 앉아 노역에 시달리고 알 수 없는 주사도 맞았다. 그 참담함과 분노가, 또한 부모에 대한 죄스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손바닥 만한 독방에서 가을을 느낄 수나 있었을까. 그런데도 윤동주는 여전히 동생의 편지에서 시어를 포착해 낸다. 컴컴한 독방에서도 그의 마음은 무너지지 않았으니 윤동주는 정녕 시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목숨이다.

시대의 아픔으로 자기를 돌아보다

윤동주가 세상에 있던 시간이 워낙 짧아 시가 많지는 않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정본 윤동주 전집>에 따르면 약 100여 편인데, 주요 시는 대부분 1)민족의 현실을 노래하거나, 2)자기 성찰을 담거나, 3)기독교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민족의 현실에서 자기 성찰을 끌어 내기도 하고, 기독교적 가치관이 민족의 현실과 연결되기도 한다. <십자가>에서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은 종교적 신념일 수도 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암울해지는 조선을 위해 조용히 희생하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윤동주의 비극적 일생 때문에 그를 손쉽게 민족시인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렇지만 윤동주가 시에서 무엇을 노래하든 언제나 그 중심에는 자기성찰과 부끄러움이 자리하고 있다.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랬고, <별 헤는 밤>에서는 ‘딴은 밤을 새워 오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라고 스스로를 부끄러운 벌레라 칭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년 초판본, 출처: 한국현대문학관)

이전에는 윤동주만큼 쉽고 아름다운 말로 자기 존재를 탐구한 시인은 없었다. 그를 애국자로만 규정하면 작품을 보는 시야가 좁아진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자기 존재를 돌아보는 성찰의 준거로 삼았던 특별한 시인이었다. 생명까지 앗아간 시대의 압력을 자기 안에서 단련해 ‘윤동주’라는 언어의 필터를 만든 셈이다.

윤동주는 시대의 아픔을 넘어 자기를 돌아보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한 시인으로 기억해야 마땅하다.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는 별에도 생명이 있음을 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수명이 있다고 해야겠지만. 윤동주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자 했을 뿐이다.

윤동주가 나라 잃은 백성이라는 죄로 희생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 희생을 기억하고, 타인을 힘과 권력으로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분노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그의 시마저 모두 민족이라는 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정신을 따라 시대의 아픔으로 먼저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다음 세대가 부끄럽지 않게 윤동주의 시를 읽는 방법일 것이다. 아래 시를 읽어 보자.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윤동주

윤동주는 본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이 시를 표제시로 하여 <병원>으로 시집을 출간하려 했다. 이후 제목을 바꾸었다가, 결국 출간이 무산되었으나 시대에 대한 윤동주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살구나무, 젊은 여자, 하얀 다리 등 첫 연에서 느껴지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 다소 낯설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흰옷을 입고,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가 시적 화자처럼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제 윤동주가 떠난 지 70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 병을 아직도 완전히 고치지 못했다. 위안부 문제만 해도 현재 진행형이다. 살다 보니 다른 병도 걸린다. 작년에는 유례없는 국정농단 사태에 맞서 많은 사람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오랜 시간 너무 많은 사람이 아팠고, 지나친 피로 속에서, 서로에게 성내기 바쁘지 않았던가.

이처럼 <병원>은 일제 치하라는 역사적 맥락을 넘어, 오늘의 현실을 대입해 재해석할 수 있다. 윤동주는 자기 시대의 아픔을 꿰뚫어 보았고, 그 아픔을 남다른 감수성이 담긴 시로 남겼다. 아픔이 존재한다면 세월을 뛰어넘어 언제라도 윤동주의 시를 읽을 수 있다. 모든 위대한 문학이 그러하듯이.

 

* 이 글은 현대건설 사보에 기고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 참고도서: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서정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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